[한경에세이] 나무의 가지를 자르는 뜻은

입력 2021-03-09 17:49   수정 2021-03-10 00:04

서울 생활을 끝내고 강릉에 내려간 동생이 주말에 눈 속에 대관령에 오른 사진을 보내왔다. 길을 걷는 발 밑에는 눈이 쌓여 있고, 등산로 옆엔 밤사이 새하얀 고드름처럼 자란 상고대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수정꽃 동산을 이룬다. 가히 별천지가 따로 없다.

멀리 산 위에는 눈이 쌓여 있고, 아래 마을엔 온갖 봄꽃이 피어있는 풍경을 어린 시절 우리는 대관령을 배경으로 늘 보고 자랐다. 봄눈이 내릴 때는 꼭 한겨울 풍경 같아도 녹기 시작하면 물처럼 사라지고 그 자리에 들풀처럼 야생화가 피어오른다. 눈이 녹은 다음 꽃이 피는 게 아니라 눈 속에 이미 피어 있는 꽃을 봄바람이 눈을 녹여 우리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. 노란 복수초와 연보라색 얼레지꽃을 우리는 늘 눈 속에 마중했다.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도 바람 속에 나부끼듯 흔들리는 바람꽃과 노루귀가 자신들의 계절을 알린다.

둘러보면 이르게 피는 꽃들만이 아니라 겨우내 땅속에 숨어 있던 온 세상의 것들이 아우성친다. 작약도 새빨간 싹을 내밀고, 상사화도 쌓인 낙엽 속에 어느새 한 뼘 키를 키웠다. 매화꽃 다음 자리를 다투기 위해 복숭아꽃과 자두꽃 앵두꽃이 색색의 구슬처럼 작은 꽃망울로 시간을 다투고, 진달래와 개나리도 이제나 저제나 자기 차례를 기다린다.

멀리 바라보이는 산은 흰 눈 속의 설국 같아도 햇살이 고루 퍼진 산 아래는 봄날의 향연이 펼쳐진다. 기온도 한없이 올라간다. 과수나무가 적든 많든 집집마다 전지가위를 잡고 과실나무들의 가지치기를 할 시기다. 도시에서 가로수 가지치기를 하는 시기와 비슷하다. 그 추억 속에 떠오르는 구절이 하나 있다. 우리 어린 날 할아버지는 전지가위 대신 낫으로 가지를 쳤다. 그래서 좀 더 단호하고 엄하게 보였는지 모른다. 할아버지가 나무의 가지를 칠 때 옆에서 낫으로 그렇게 자르면 나무가 아파하지 않느냐고 묻자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다.

“사람은 말로 가르쳐서 다듬고, 나무는 가지를 쳐서 다듬는단다. 그래서 둘 다 큰 재목이 되고, 큰 과실나무가 되는 거란다.”

할아버지는 따로 공부를 하신 분도 아닌데, 낫을 잡든 괭이를 잡든 손자들이 어떤 질문을 하면 거기에 늘 철학적이고 교훈적으로 말씀하셨다. 집 주변에 많은 과실나무를 심으신 것에 대해서도 “그것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밤 한 톨을 화로에 묻는 것과 땅에 묻는 것의 차이라고, 화로에 묻으면 당장 어느 한 사람의 입이 즐겁고 말겠지만, 땅에 묻으면 거기에서 나중에 1년 열두 달 화로에 묻을 밤이 나오는 것”이라고 말씀해주셨던 분이다. 그걸 다시 아이들에게 말해준다.

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봄만 되면 일부러 다시 떠올리려 하지 않아도 따뜻한 바람 속에 봄의 정령이 그 일들을 다시 떠올려준다. 어린 시절, 나는 그 집 울타리 사이로 병아리 떼가 놀고 간 뒤에 미나리 파란 싹이 돋아나는 걸 보며 자란 사람이기 때문이다.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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